푸른 국화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내가 떠올리는 세상의 다이어그램은 일그러진 구체이다. 짐작하는 바는 있지만 무언가 빠져있다. 그래서 쉼없이 흐르고 변화한다.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다. 물론 더 나은 것도 사실은 없다. 관계와 조건 안에서 대상의 형태변화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이제와 돌아보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거리감각이 변화의 가능성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문이 들었다. 결국에 나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인가 나는 변화할 수 있는 사람인가. 흐름에 내맡길 수 있는 사람인가.
노을은 붉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닐지 모른다. 무채색이라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단지 사람의 눈이 그렇게 지각한다. 아마 그 무엇이라 해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변화의 형태를 체감하는 것이 나에게는 더 분명한 이유처럼 보인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으니 아름다움은 너무 흔하고 새로움은 그것의 변주와 다를 게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아름다움은 존재와 관계하는 연속성에 있을 수도 있다. 만약 내가 하는 일이 특별함을 찾는 일이라면 사진을 계속 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카렐 차페크의 한 단편 소설에서 바보 소녀 클라라는 남들이 찾지 못하는 푸른 국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철길 건너에 있었지만 경고문을 본 사람들은 건너갈 생각을 하지 않고, 글을 읽지 못하는 그녀만이 꽃다발을 가져올 수 있었다. 나의 거리감각은 푸른 국화를 찾는 사람들과 같다. 그것을 찾지 못해도 상관이 없다. 그들의 생각과 동조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것은 곧 나의 윤리의식에 닿는다. 나는 처음부터 클라라가 아니었다.
알면서 건널 수 있을까, 경고를 무시하고도 철길을 건너지 않을 수 있을까? 흐름 속 나는, 내 삶의 방식을 알 수 있다면 그들의 삶 역시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직접적인 관계와는 상관이 없었다. 나와 그들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 거리가 필요했다. 특별함을 찾지 않기에 가까이 갈 수도 없다. 하지만 내가 건너지 않을 수 있을까. 푸른 국화를 발견하고도 달려가지 않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2005년 ‘대추와 꿀벌’ 작업을 형식적으로 이어왔다면 나름의 결과를 얻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적어도 어떠한 작업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고 설명도 쉬웠을 것 같다. 일관성은 특정한 대상이나 표현형식보다는 벗어날 수 없는 흐름 안에서 거리를 두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사진을 촬영하듯이 바라보았다. 지금은 작업과 삶의 태도를 구분하지 않는 것이 한계에 이른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현재의 방법론에 대해서 회의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변화를 거스르는 방식이라면, 클라라가 되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